기타 정보

19금) 연산군과 엄씨,정씨

엉클박 2014. 3. 24. 21:09
반응형






충격적인 내용이 있기에 19금입니다.


이번 내용은 연산군실록에서 나오는 기록 중 가장 충격적인 일이고, 언뜻 야사에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연산군에 관한 엔하위키에서는 이 이야기를 야사로 말하고 있는데 사실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설명을 간단히 하면 안양군과 봉안군은 귀인 정씨의 아들입니다.

귀인 정씨와 엄씨는 모두 성종의 후궁입니다.

그런데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이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의 참소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고 안양군과 봉안군을 이에 연루시킵니다.





연산군 10년 3월 20일

전교하기를,

“안양군(安陽君)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이봉(李㦀)을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숙직 승지 두 사람이 당직청에 가서 항과 봉을 장 80대씩 때려 외방에 부처(付處)하라. 또 의금부 낭청(郞廳) 1명은 옥졸 10인을 거느리고 금호문(金虎門) 밖에 대령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항·봉을 창경궁(昌慶宮)으로 잡아오라.”

하고, 항과 봉이 궁으로 들어온 지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모두 다 내보내라.”

하였다. 항과 봉이 나오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항과 봉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왕이,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4245) 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왕이 손에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침전 밖에 서서 큰 소리로 연달아 외치되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하기를 매우 급박하게 하니, 시녀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대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 신씨(愼氏)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

왕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위 기사는 폐비 윤씨의 죽음의 책임을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에게 묻고 귀인 정씨의 아들들을 이에 연루시켜서 장 80대를 치고 귀양에 보내고자하였습니다. 또 어두운 것을 이용해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자신의 생모를 치게 하였으나, 안양군은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모르고 치고, 봉안군은 어머니인 것을 느껴 치지 않습니다.

이후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채를 잡고 인수대비전으로 가서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격적인 것이 엄씨와 정씨의 시신을 젖갈로 만들어 산과 들에 흩어 버렸습니다.

(인간을 젖갈로 만드는 형벌[醢-젓갈 해, 형벌이름 해]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것이 자로가 醢형을 받았고 이에 공자가 집에 있던 醢 그릇을 뒤집었다는 내용인데, 이게 언제부턴가 공자의 식인설로 돌았는데, 사실은 친일 대만 작가의 책에서 처음 나온게 공자 식인설이고 공자는 아끼는 제자 자로가 醢형을 받자 같은 한자인 醢(젖갈)도 보기가 싫어져서 집안의 젖갈 그릇을 뒤집은 것이 사실입니다.

즉, 醢형은 사약과 같이 명예형[죽는 것은 같으나 왕족이나 고관의 체면과 신체를 손상시키지 않고 죽이는 방법입니다.-유사한 의미의 형벌이 일본에는 할복이 있습니다 처형자 자신이 자신의 배를 가르며 무사로서의 용기를 보여주고 동시에 사형집행인이 목을 참하는 방식입니다.

몽골에서는 피를 보이며 죽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귀족들에게는 자루에 담아져서 죽여지는 것을 행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징기스칸의 라이벌 자무카가 자루에 담겨져 죽게 됩니다]의 가장 반대에 있는 형벌로 보면 됩니다. 인간을 음식인 젖갈(醢)과 같이 만드는 형벌로 그 대상에 대한 분노나 처벌의 강도가 다른 어떤 형벌보다 낮지 않습니다.)


실록에는 醢형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으나 고려사나 삼국사기에도 醢형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습니다.

찾아보실 분들은 삼국사기 견훤열전과 궁예열전, 고려사 이공승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이부분은 초록불님의 블로그를 참고하였습니다.)


연산군 10년 3월 21일

전교하기를,

“안양군 이항(李㤚)에게 길든 말 한 필을 주라.”

하였다. 항이 지난밤에 명령대로 그 어머니를 장 때렸기 때문에 상을 준 것이다.


다음날 연산군은 지난 밤에 자신의 생모를 때린 안양군에게 말 한 필을 내립니다.

자신의 말대로 생모를 때린 것에 대한 상으로...

이후 안양군과 봉안군은 귀양지에서 사사되어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반응형